한쪽 의존 외교가 불러온 현실과 다변화의 길 제 4편 – 유럽연합(EU): 규범과 연대의 길
1. 서론 – 유럽이 주는 또 하나의 축
오늘날 한국 외교의 좌표를 살펴보면, 한쪽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안보의 축에, 또 다른 한쪽은 중국이라는 방대한 시장의 축에 묶여 있다. 러시아 역시 기회와 금기를 동시에 안고 있지만, 여전히 균형의 한 축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이 셋 외에 종종 간과되는 거대한 파트너가 있다. 바로 유럽연합(EU)이다.
유럽은 단일 국가가 아니다. 그러나 27개국이 규범과 제도로 묶여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군사력으로 세계를 압도하지는 않지만, 국제사회에서 규범과 제도의 설계자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국에 있어 유럽은 단순한 교역 상대를 넘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줄 대안적 축이 될 수 있다.
2. 규범과 가치의 힘
유럽은 힘의 논리보다 규범의 힘을 앞세운다. 민주주의, 법치, 인권, 환경 보호와 같은 가치들이 유럽 정치의 기본 구조를 형성한다. 유럽연합은 때로는 느리게 움직이지만, 그 속도만큼 확고하다. 규범으로 묶인 공동체는 단기적 이해득실보다는 장기적 안정과 지속 가능성을 지향한다.
특히 기후 위기 대응에서 유럽은 세계적 선도자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유럽 그린딜은 단순한 환경정책이 아니라 세계 경제의 규칙을 다시 쓰는 작업이다. 데이터 보호, 개인정보 규제, 노동 기준 역시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 잡았다. 한국이 유럽과 연대할 때 얻는 이익은 단순한 시장 접근권이 아니라, 규범을 공유하는 신뢰다.
3. 경제·산업 협력의 기회
한국과 유럽의 협력은 이미 경제적 토대 위에서 작동 중이다. 2011년 발효된 한-EU 자유무역협정(FTA)은 한국이 체결한 첫 번째 메가 FTA로, 이후 양측 교역은 꾸준히 증가했다. 그러나 앞으로의 협력은 단순 교역을 넘어 산업 구조 전환과 직결된다.
- 탄소중립·녹색 전환: 유럽의 ‘그린딜’과 한국의 ‘2050 탄소중립’은 접점을 형성한다. 수소·재생에너지·전기차 배터리에서 협력은 필연적이다.
- 디지털 전환: 반도체, 인공지능, 5G와 같은 첨단 산업에서 유럽은 규제 표준을 주도하고, 한국은 기술력을 제공할 수 있다.
- 공급망 안정: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은 공급망 다변화에 절실해졌다. 한국은 신뢰할 수 있는 기술 파트너로 자리할 수 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라면, 유럽은 함께 규칙을 만드는 동반자로 다가올 수 있다.
4. 다변화의 전략적 의미
유럽과의 협력은 단순한 시장 확대가 아니다. 그것은 외교의 균형추를 하나 더 세우는 행위다.
미국의 압박은 언제든 거래로 변할 수 있고, 중국의 거대한 시장은 언제든 덫이 될 수 있다. 러시아는 금기와 가능성이 얽힌 불안정한 카드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은 한국에 안정성을 제공한다. 규범과 제도를 기반으로 한 협력은 단기적 이익에 흔들리지 않는다.
다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교역 상대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존엄과 자율성을 확보하는 길이다. 유럽은 그 전략적 의미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파트너다.
5. 철학적 해석 – 규범 속의 자유
힘의 논리만으로는 자유를 지킬 수 없다. 힘은 언제든 더 큰 힘에 의해 무너진다. 그러나 규범 속에서 지켜지는 자유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유럽은 완벽하지 않지만, 다자적 질서를 존중하는 모범 사례다. 한국이 미국과 중국의 힘의 논리에 끌려다니지 않고, 러시아의 금기를 넘어 균형을 만들려면, 규범의 힘을 빌려야 한다. 유럽은 그 거울이다.
6. 결론 – 연대의 미래
한국 외교의 미래는 단순히 안보를 지키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율과 존엄을 확보하는 일이다. 미국·중국·러시아라는 강대국 틈에서 한국은 늘 흔들려왔다. 그러나 유럽은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규범과 연대를 공유하며, 지속 가능성을 함께 모색하는 파트너. 그것이 한국과 유럽의 관계다. 다변화의 길은 유럽에서 더욱 단단해진다. 한국은 이제 선택지를 넓혀야 한다. 유럽과 함께하는 연대는 단순한 외교 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문명 구조를 향한 동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