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녘, 고흥의 갯벌 위로 물이 빠지고 고요히 정박한 어선이 실루엣처럼 떠 있습니다. 산 너머로 떨어지는 햇살은 바다를 따라 퍼지고, 그 빛은 마을의 노인들을 감쌉니다. 이곳은 단지 오래 사는 마을이 아닙니다. 아프지 않고 늙어가는 법을 보여주는 곳, 전라남도 고흥군입니다.
노년의 건강, '병들지 않는 삶'이 가능한 곳
나이 들수록 사람들은 병원을 자주 찾게 됩니다. 하지만 고흥의 많은 노인들은 말합니다.
“나는 아직 약을 먹지 않는다.”
그 말은 단순한 자랑이 아닙니다. 실제로 고흥은 건강수명이 긴 마을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흥군 도양읍, 점암면, 봉래면 일대는 90세 이상 장수 어르신의 비율이 전국 평균을 크게 웃돌며, 치매·고혈압·당뇨 같은 만성질환 비율도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고흥군 보건소와 전라남도 보건환경연구원의 건강지표 분석에 따르면, 이 지역 노인들은 신체 활동량이 많고 식생활이 단순하며, 정서적 안정감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건강검진에서 고혈압, 고지혈증 수치가 정상이거나 우수한 경우가 많고, 우울감이나 고립지수 역시 낮은 편입니다. 고흥은 단지 오래 사는 마을이 아니라, ‘병들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남해안 자연 식단의 비밀 – 해조류와 햇살
이곳에서 노인들이 매일 먹는 식사는 단출하지만 강력한 생명력을 지닙니다.
김, 다시마, 톳, 미역 등 해조류, 그리고 고등어·갈치 같은 등푸른 생선이 식탁의 중심을 이룹니다. 여기에 제철 채소, 고구마, 콩, 된장국이 더해집니다.
해조류는 칼슘과 요오드, 식이섬유, 미네랄이 풍부해 뼈 건강과 갑상선 기능에 도움을 주며, 특히 전통 방식으로 말린 김에는 비타민 C와 E도 다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이곳 식단은 젓갈이나 염장식품 대신 싱겁게 무친 나물 반찬, 집에서 담근 된장국 등으로 구성되며, 식재료의 원형을 그대로 살리는 방식이 특징입니다.
전문가들은 고흥 식단이 지중해 식단과 유사한 항산화 식단 구조를 가진다고 평가합니다. 이는 염증 수치를 낮추고, 장 기능을 개선하며, 혈관 건강을 지키는 데 효과적입니다.
노년의 정서적 건강 – 공동체가 주는 안정감
고흥에서는 혼자 사는 노인이 드뭅니다. 대개 자녀와 함께 지내거나, 이웃과의 유대가 끊이지 않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마을마다 경로당과 회관에서는 노래교실, 건강체조, 웃음치료, 텃밭 가꾸기 등 주 2~3회 정기적인 모임이 이뤄지며,
누군가 아프거나 어려움이 생기면 서로 돕는 문화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구조는 노인의 심리적 안정과 외로움 방지에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실제로 고흥 지역의 노인 우울증 진단률은 전국 평균보다 낮고, 정서적 고립을 느끼는 비율도 현저히 낮습니다.
이웃과의 자연스러운 소통은 단순한 정서적 지지가 아니라, 면역력과 정신 건강을 지켜주는 실질적 기반이 됩니다.
일상이 곧 운동 – 고흥 노인의 활동 루틴
고흥에서는 노인들이 ‘운동을 하러 나간다’는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루를 그대로 움직임으로 채웁니다.
아침엔 텃밭을 살피고,
낮에는 미역과 다시마를 손질하거나 장에 다녀오고,
오후엔 마당을 쓸고, 이웃과 차를 나누며 몸을 움직입니다.
이런 일상은 자연스럽게 하루 3~5시간의 저강도 신체활동을 만들어내며, 이는 노년기 관절과 근육 유지에 가장 효과적인 방식입니다.
고정된 시간표가 아니라, 생활 속 루틴으로 몸을 쓰는 것이 고흥 노인들의 건강 비결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할 일이 있으니, 몸이 굳을 틈이 없어요.”
고흥이 보여준 장수의 조건
우리는 흔히 오래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진심은 그 너머에 있습니다.
정말 원하는 것은, 아프지 않고 오래 사는 것입니다.
고흥은 이 소박하지만 강력한 바람을 현실로 살아내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난 식재료로 차린 식사, 이웃과 함께 웃는 오후, 그리고 스스로 움직이는 삶.
특별한 약도, 고가의 의료 서비스도 없이, 이곳은 건강하게 늙는 삶의 가능성을 열어 보입니다.
장수는 유전이 아니라, 환경입니다.
병을 막는 건 약이 아니라 식단이고, 외로움을 막는 건 병원이 아니라 이웃입니다.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삶의 태도, 그것이 곧 우리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참고자료
- 전라남도 보건환경연구원, 『장수지역 건강지표 분석 보고서』, 2021
- 고흥군 보건소, 『지역 노년층 건강실태조사』, 2022
- 한국영양학회, 「해조류 중심 식단과 만성질환 예방」, 2018
- 한국장수학회, 『한국 고령자의 생활패턴과 수명연장』, 2020
- MBC 다큐 《바다 곁의 장수 마을 – 고흥》,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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