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니카 — 말 대신 남겨진 것들
전쟁과 폭력은 인간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피해는 신체에 그치지 않고, 생활 구조와 사회 질서를 무너뜨린다.
시간이 지나도 그 영향은 사라지지 않으며,
사람들은 흔들린 일상을 복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기억은 반복적으로 소환되고,
전쟁은 개인의 행동 패턴을 바꾸고, 사회 전체에 지속적인 트라우마를 남긴다.
폭력은 예고편 없이 마구 달려든다.
대비할 시간도 없이, 모든 것이 무너진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북부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에
폭탄이 쏟아졌다.
전쟁은 이 조용한 마을을 실험장처럼 삼았고,
하루아침에 일상이 무너졌다.
그해, 피카소는 한 점의 그림을 그렸다.
침묵 대신 붓을 들었다.
사람들은 그림 앞에서 몸을 굳힌 채, 시선을 옮기지 못했다.
게르니카는 어떤 해석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림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드러낸 상태였다.
파괴된 마을, 그리고 한 화가의 응답
게르니카는 정치 중심지도, 군사 요충지도 아니었다.
하지만 프랑코 정권과 그를 지원한 독일과 이탈리아는
이 작은 마을을 폭격 연습장처럼 다뤘다.
민간인의 피난처, 시장, 가정집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말과 소, 어린이와 노인이 함께 깔렸다.
무차별적이고 무의미한 폭력.
그것은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학살이었다.
피카소는 이 소식을 듣고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표현력을 동원해
이 사태를 기억의 그림으로 남기기로 결심한다.
파편과 절규의 시선 흐름
게르니카는 가로 폭이 7미터가 넘는 거대한 그림이다.
마주 서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간다.
관찰자 시점에서 이 흐름은 동물의 본능 → 인간의 고통 → 불타는 파괴로 이어진다.
왼쪽, 검은 배경 속에서
거대한 황소와 쓰러진 여성이 눈에 들어온다.
황소는 고개를 돌리고 있고, 여인은 죽은 아이를 안은 채 절규한다.
이 시작은 생명과 상실의 충돌이다.
가운데로 시선을 옮기면
부서진 사람의 몸, 찢긴 손과 발,
절규하는 말, 깨진 칼과 함께 불쑥 튀어나온 손이 있다.
모두가 찢기고, 울부짖고, 해체되어 있다.
그리고 오른쪽,
불길에 휩싸인 인물이 팔을 들고 있고,
창백한 얼굴의 여인은 온몸에 절규를 휘감고 있다.
화면은 아비규환과 고통의 신음소리로 가득하다.
화면 위에는 전등이 있다.
그것은 해, 혹은 감시자의 눈, 혹은 공습의 빛이다.
밝지만 따뜻하지 않고,
비추지만 구원하지 않는다.
게르니카는 어디에도 시선을 붙잡아두지 않는다.
눈은 자연스럽게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찢긴 형상과 격렬한 움직임 사이를 떠돈다.
한 번에 전체를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파편 하나하나를 따라가며 그림 속을 걷게 된다.
작가의 내면 — 시대와 욕망 사이에서
피카소는 단지 재능 있는 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역사의 충격에 반응한 예술가,
그리고 시대를 외면하지 않은 정치적 인간이었다.
게르니카 이후, 그는
**《한국에서의 학살》(1951)**이라는 작품으로
또 한 번 무력한 생명에 대한 폭력을 고발한다.
그 그림은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을 연상케 한다.
좌우로 나뉜 장면.
왼편엔 혼란에 휩싸인 민간인들,
오른편엔 표정 없는 병사들이 서 있다.
이 정지된 구도는,
그림 속 구도이자 사회의 구도가 되어 반복되어 왔다.
그리고 그 반복의 중심에는
항상 여성의 형상이 있었다.
게르니카 속 여성들은
피카소가 현실에서 마주한 인물들의 흔적이었다.
이웃이기도, 연인이기도 한 존재.
함께 삶을 견뎌낸 동지이기도 했다.
그림 속 절규와 파열은
그가 가까이에서 목격한 여성들의 고통과 겹쳐진다.
형상은 그렇게,
피카소 곁에 실존했던 사람들로부터 왔다.
아이를 안은 어머니, 불 속의 여인, 창백한 얼굴.
이들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삶과 죽음, 사랑과 죄책감이 얽혀 있었다.
게르니카의 형상들은
피카소가 연인과의 관계 속에서 겪은 정서적 충돌과
전쟁을 바라보는 자국민으로서의 무력함까지 반영한다.
게르니카는 시대의 비극이자,
피카소의 분열된 내면과 여성상에 대한 무의식의 반영이기도 하다.
게르니카 앞에 선 인간
게르니카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 형상은 폭발음처럼 시선을 강타한다.
그 앞에 선 사람은, 파편처럼 흩어진 장면을 통해
공포의 밀도를 체감하게 된다.
그림은 소리를 포함하지 않지만,
절규는 들리고, 불길은 보이며, 공포는 전해진다.
게르니카의 중심은 시선을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좌측과 위, 아래로 흩어지는 구도 속에서
형상들은 단순하지만 압도적인 의미로 밀려온다.
그 속에 우리가 아는 인간의 고통과 역사가 있다.
피카소는 자신이 본 세계를
자신의 방법으로 표현해 냈다.
그는 시대를 직시했고,
그 직시의 깊이만큼 자신의 내면도 응시했다.
게르니카는 그렇게 지금도 우리 앞에 남아 있다.
과거에 대한 단순한 사건 기록이 아니라,
폭력이 반복되는 세계에 대한 경고로.
우리는 이 그림 앞에서 오래 머물러야 한다.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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