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시작과 끝, 존재의 의미를 묻는 고갱의 질문은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그림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인상주의 화집을 넘기던 중, 내 눈과 마음을 동시에 붙잡은 그림 한 점이 있었다.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제목부터 특이했다.
낯선 풍경, 말 없는 인물들, 분명히 배경은 이국적인데
이상하게도 그 그림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이 작품은 폴 고갱이 말년 타히티에서 그린 유작이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이 질문을 화폭에 남겼다.
이 글은 그 그림에 대한 해석이 아니다.
그 질문을 받아 안은 한 사람의 조용한 사유 기록이다.
고갱의 삶과 질문에 이르기까지
그림 제목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았다.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삶의 기원, 존재의 의미, 죽음 이후를 한 번에 묻는 이 문장은
누가, 어떤 마음으로 남긴 것일까.
폴 고갱.
그는 원래 화가가 아니었다.
20대엔 증권 중개인이었고, 안정된 직장을 다니며 가정을 꾸렸던 사람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모든 걸 내려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상주의 화가들과 어울리며 그림을 배우고, 전업 작가가 된 후에도
프랑스 사회와는 거리를 두고 살았다.
결국 그는 문명을 떠나 타히티로 향했다.
병든 몸, 불안정한 생활,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예술 속에서
그는 한 점의 그림을 남긴다.
그 그림을 그리기 1년 전, 그는 딸을 잃었다.
육체의 고통과 정신적 상실,
삶의 의미가 산산이 흔들리던 시기였다.
고갱의 질문이 배치된 방식
그림은 가로로 긴 캔버스 위에 세 개의 시간대를 담고 있다.
오른쪽에는 태어난 아기와 곁에 있는 젊은 여인이 있다.
중앙은 삶의 한가운데에 있는 인물들.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 생각에 잠긴 청년, 일상의 모습이 그려진다.
왼쪽에는 어두운 구석에 앉아 있는 노인.
몸을 웅크린 채 죽음을 맞이하는 듯한 자세다.
고갱은 이 구도를 통해 삶의 처음과 중간, 그리고 끝을 나란히 배치했다.
시간은 그림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정지된 상태에서, 보는 이가 흐름을 인식하도록 구성돼 있다.
질문은 그림 바깥에 있다.
그는 캔버스 위에 직접 문장을 쓰지 않았다.
대신 제목으로 남겼다.
마치 그 질문은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던져진 것처럼.
질문은 결국 나에게 도착했다
나는 어느 순간, 그 질문을 더 이상 남의 것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는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 모두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삶은 출발선이 명확하지 않다.
기억은 태어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고,
의식은 이미 주어진 세계 안에서 눈을 뜬다.
출생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사건이다.
누가 나를 낳았는가, 어떤 시대와 장소에 태어났는가,
그 모든 것은 나의 의지와는 무관한 전제로 주어진다.
그 전제 위에서 우리는 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시작이 무작위였다고 해서,
삶 전체가 의미 없이 흘러가는 건 아니다.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은 생물학적 기원을 넘어선다.
그건 기억과 시간, 경험과 상처,
그리고 나를 만들어온 사람들과 사건들의 누적된 층위를 묻는 말이다.
나는 누구의 딸, 아들로 불렸고
어떤 말투 속에서 자랐으며,
어떤 풍경을 처음으로 익숙하다고 느꼈는지,
이 모든 것은 내 삶의 출처다.
그것들은 내 정체성의 지층처럼 겹겹이 쌓여
지금의 나라는 형태를 빚는다.
그리고 그 층위는 단순히 과거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의 기억 속에서
자신의 ‘기원’을 갱신하고 있다.
어제의 나는 지금의 나를 만든다.
‘어디서 왔는가’는
끝없는 ‘형성의 과정’이기도 하다.
삶은 이미 정해진 기원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 지속적으로 구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질문이 있는 한,
나는 단지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자기 삶의 기원을 찾아가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생각보다 쉽게 대답할 수 없다.
이름, 직업, 역할, 성격…
우리가 흔히 자기 자신을 설명할 때 내세우는 것들은
사실 대부분 타인이 이해하기 위한 외형적인 정의에 가깝다.
그 속에 있는 **진짜 '나'**는
늘 그 정의 바깥에 있다.
우리는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어떤 날은 자식으로,
어떤 날은 부모로, 동료로, 혹은 그저 행인 1로 존재한다.
삶은 늘 관계 속에서 정의되고,
그 관계들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렇다면 나는 관계가 바뀔 때마다
다른 존재가 되는 걸까?
아마도 우리는 단일한 자아로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시간과 경험 속에서 유동하는 정체성을 가진 존재일 것이다.
어떤 감정은 나를 흔들고,
어떤 기억은 나를 지운다.
어떤 말은 내가 몰랐던 내 얼굴을 비춰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곧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떤 방향을 향해 흐르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내가 좋아하던 것이 변하고,
견고하다고 믿었던 신념이 깨질 때,
나는 깨닫게 된다.
나라는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형성되고 있는 과정’이라는 것.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그 생각으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다.
하루의 끝에 스스로에게 던지는
짧은 질문 하나.
“오늘 나는 누구였는가?”
그 질문이 쌓일수록,
나는 점점 내가 되어간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죽음은 언제나 어렴풋한 거리에서 따라온다.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고,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도달할 것이라는 예감처럼 다가온다.
우리는 언젠가 모두 이 삶을 떠나게 된다.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죽음을 단지 먼 미래의 일처럼 다루거나,
때때로 절대 말해서는 안 될 금기처럼 피한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끝이자,
삶을 더 선명하게 만드는 거울이라고.
죽음을 생각하면
지금 이 시간이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오늘 나눈 한 마디,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의 얼굴,
해가 질 때 창에 비치는 그림자 하나까지도.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단순히 ‘죽음’이라는 하나의 점이 아니라,
조용히 사라져 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 과정 속에서
어떤 이는 기억으로 남고,
어떤 이는 물건이나 말, 습관 속에 살아남는다.
나는 생각한다.
사라짐은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존재로 옮겨지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민들레 씨앗이 바람에 흩날릴 때
그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움직임이듯이.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명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사라짐의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잘 사라지고 싶은 사람이다.
무엇을 남기겠다는 말이 아니라,
사라질 때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이름으로 남고 싶은 것이다.
이 질문들은 철학이 아니라 현실의 중심에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나는, 그 질문들 앞에서 오래 멈춰 있었다.
질문하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
우리는 모두 질문을 안고 산다.
누구도 완성된 해답 속에 사는 사람은 없다.
그저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품고,
다른 방향에서 그 물음에 머물 뿐이다.
삶이 어렵다고 느껴질 때,
막막함 속에 스스로를 잃어버릴 때조차
그 속에는 언제나 ‘묻고 있는 나’가 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이 선택은 옳았을까?”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물음은 혼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려는 태도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완벽하지도 않고,
삶의 정답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질문을 멈추지 않는 태도로 살아가고 싶다.
생각하고,
돌아보고,
다시 걷는 일.
그 반복이 삶이라면,
나는 오늘도 조용히 내 삶을 묻는다.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여전히 나는 모르지만,
이 물음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분명 무의미하지 않다.
https://senior-space.tistory.com/34
가끔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아줘야 할 때가 있다
한 사람의 하루가 무너지는 데는거창한 사건이 필요하지 않다.말 한마디,다른 사람의 표정,깨진 약속 하나면 충분하다.지친 하루 끝에 남는 건 ‘버텼다’는 사실 뿐이고,그걸 안아줄 사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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